[구술] 정판룡교수 마지막 병상에서 서언을 쓴 <빛나는 탐구의 길> (김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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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대형구술시리즈 '문화를 말하다' 27
김영금 편 7
정판룡교수 눈물의 서언 쓴 <빛나는 탐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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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자연과학자 계렬 실화집 《빛나는 탐구의 길》
연변대학 정판룡 교수는 암으로 세상 뜨기 몇 달 전 병상에 누워계셨는데 그때 우리 집 남편도 암으로 옆 병실에 입원해 있었어요. 내가 교수님 병실에 방문을 들어가니 선생님은 마침 내가 쓴 실화집 《한세대의 별》을 보고 있었어요.
“선생님, 병치료로 힘드는데 어찌 책을 보십니까?”
"영금이 쓴 우리 민족 자연과학자들의 사적에 감동되여 많이 울었소.”
그러시더니 "다음번 책을 내게 되면 내가 꼭 ‘머리말’을 써주겠소 "라고 말씀 하셨어요.
"선생님, 이렇게 고달픈데 어떻게 ...” 하고 병실을 나왔어요.
얼마후 교수님이 전화로 나를 불렀어요. “내가 초고를 써놓았는데 가져다 고쳐서 쓰오.”
나는 달려가다 싶이 교수님 댁을 찾아갔어요. 선생님은 쏘파에 누웠다 겨우 일어나 책상앞으로 가시더니 서랍안에 넣어두었던 원고를 꺼내 나에게 넘겨주는것이였어요.
내가 받아서 읽으며 눈물을 훔치니 선생님은 “사회과학자라는 사람이 여태 이렇게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우리 민족을 위해 공헌했다는걸 모르고 있었으니 정말 미안하오. 이런 머리말이라도 몇자 쓰니 좀 빚을 갚은 것 같소. 제가 이렇게 고생해서 후대들에게 전해주니 고맙구만. "
그 머리말을 받아들고 교수댁을 나서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어요. 그뒤 두달만에 선생님은 세상을 떠났어요.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조선족자연과학자 계렬 실화집 《빛나는 탐구의 길》(상 하 2003년)을 출판해 내였어요.
우리 나라 첫 원자탄 실험에 참가한 현광혁 교수(玄光赫 1934-)
1964년 10월 16일 우리 나라 첫 원자탄 실험이 성공하는 그 감격스런 력사적 현장에는 조선족과학자 현광혁연구원도 있었어요.
현광혁은 연변 화룡사람으로서 어릴적 공부를 잘해 ‘천재학생’으로 불리웠어요. 무서운 가난 때문에 맨발로 학교를 다니면서도 연변고급중학교 3년을 최우등생으로 졸업한 그는 1952년 7월, 할빈공업대학에 입학하였지요. 그는 나라의 1등 보조금으로 공부를 하면서 나라에 보답하고 민족을 위해 영광을 떨치려는 웅심을 키웠어요.
김영금 작가의 인터뷰를 받고 있는 핵전문가 현광혁 교수(오른쪽)
6년 대학기간 그는 과외시간을 도서관에서 로어참고서를 읽고 기술자료를 읽으면서 금후 사업을 위한 기초를 튼튼히 닦았지요. 1958년 7월 할빈공업대학 동력기계학부를 졸업하고 나라의 수요에 따라 북경제2기계공업부에 배치받은 그는 그해 국경절전후로 설계원에 도착한 구쏘련전문가들을 모시고 핵전문기술을 배우기에 열심하였지요.
그러던 1960년 8월 3일, 핵공업건설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구쏘련 전문가들이 갑자기 몽땅 철거를 하였지요. 그들은 철거하면서 중국의 핵공업기지는 페허로 될것이고 핵설비는 페철로 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어요.
현광혁은 조직에 찾아가 우리가 합심하여 고심히 연찬하면 우리 절로 원자탄을 만들수 있다고 했어요. 그때 그에게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던 것이였어요. 대학시절 그는 로어를 잘 학습한 기초상에서 원자력에 관한 2000여개 되는 단어, 품사들을 몽땅 로어로 외워두었어요.
그리하여 구쏘련전문가들이 도착하여 2개월 후에는 그들과 능란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되였지요. 구쏘련전문가들은 머리가 좋고 리해력이 빠르고 해박하고 로어에 능한 현광혁이를 지명하여 데리고 다니며 원자력에 관한 기술을 상세히 가르쳤지요. 한 구쏘련전문가는 엄지손을 내들고 중국에 현광혁이와 같은 전문가가 몇명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체의 힘으로 원자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칭찬하였지요.
그때 30살도 안되는 현광혁이는 공예과, 설비과, 주기과(主机科) 등 세개 과의 과장직을 동시에 짊어지고 설계임무를 맡아하였어요. 당중앙의 결책과 방침에 따라 능력있는 공장 지도자들과 수많은 총명한 고급기술자. 전문가, 로동자들의 지혜와 노력분투로 마침내 우리 나라 자체의 힘으로 첫 원자탄을 성공적으로 폭발시켰지요. 현광혁은 이 사업에서 돌출한 공헌을 하여 핵시설공장 선진사업일군으로 되였어요.
그뒤로 그는 3선(三线) 건설현장에 내려가 전반 핵연료순환과정의 중, 장기 계획연구사업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면서 우리 나라 저명한 핵연료순환전문가로 되였어요. 당시 실패와 좌절을 이겨내며 구쏘련전문가들이 만든 설비보다 더 선진적인 전용설비를 설계하여 전국과학기술대회상(1987년), 성과학기술상을 탔지요. 이 성과는 중국핵공업군공사에 기록되였어요.
국가기밀에 속하는 핵분야에 종사한 40년간 그는 가족들과도 련계를 끊고 살다보니 모두 그를 ‘죽은 줄로 알고’ 있었지요. 퇴직한 후에야 형님을 찾아 고향에 오게 되였어요. 형님은 동생에게 늦게나마‘환갑상’을 차려주며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그리움 나누었지요.
〈종양의학의 아버지〉 김현택 교수(金显宅 1904년-1990년 )
2001년 5월 24일 내가 중국종양의학의 창시자 김현택 교수를 취재하러 갈 때는 그가 세상뜬지 10년이 넘었어요. 하지만 이 전기적 인생을 살아온 일대 위인에 대한 숭경의 마음을 안고 무더위를 아랑곳 않고 그가 창립한 천진종양의학병원으로 찾아갔지요.
김현택교수는 서울에서 태여났고 1919년 3.1독립운동때 사립배재중학 3학년생으로 동맹휴학을 하고 삐라를 뿌맀어요. 일제놈들의 잔혹한 진압에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면서 더는 서울에 있을 수 없게 되지요. 아버지의 배치로 그는 신의주까지 와서 한 장사군의 큰 멜광(辈筐)속에 숨어 중국 단동에 들어왔어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형님의 인도로 열심히 학습에 노력하여 상해로강중학교를 거쳐 세계 일류 교육수준을 가진 북경협화의학원(8년학제)을 다니게 되지요. 그뒤로 미국뉴욕주립의과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북경협화의학원 병원에 남아 의술을 연찬하였지요.
김현택 교수의 생전에 병문안을 하면서 많은 관신을 돌려준 전국 정협 전임주석 리서환(오른쪽)
1937년에는 또 바다를 건너 미국에 가 류학을 하면서 저명한 스승을 모시고 종양병리, 종양방사치료, 종양외과를 연수하였어요. 그뒤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전전하면서 의료연구고찰을 진행하고 선진기술을 습득하였으며 초청에 의해 강의를 하고 외과수술 시범도 하였지요. 그의 연박한 지식과 재능은 세계에 알려졌고 미국종양연구기구들에서 그를 초빙하였지요. 그러나 그는 병마와 빈궁에 시달리는 조국을 잊지 않았으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암환자들을 생각하고 단연히 귀국을 합니다. 그때는 1939년경이였지요.
그리고 중국에는 사랑하는 안해가 있었어요. 안해 오패구는 천진시 4대 자본가중의 대자본가의 손녀였지요. 연경대학(북경대학)에 다닌 그녀와 한차례 하령영에서 우연히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지요. 부모들의 반대도 불구하고 이 조선청년과 ‘가출결혼’을 한 오패구는 56년이란 인생행로에서 남편을 뜨겁게 사랑하였으며 덕망높고 의술이 뛰여난 남편으로 하여 자부심을 느끼며 행복한 ‘김부인’ 으로 살아오셨어요. .
하지만 1966년 ‘문화혁명’이 일면서 그들 부부는 심한 타격을 받았지요. 김현택 교수는 ‘반동학술권위’ 로 투쟁받고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할 권리마저 잃었으며 ‘외국을 숭배하는 잡귀신’으로 몰려 3년간 로동개조를 하였지요. 그것도 병원에서 실험용 개를 가두는 ‘개굴’에 갇혀 변소나 복도의 ‘위생청결’을 하였지요. 그런 위험에 처한 환경 속에서도 위급한 환자들이 몰래 진찰을 부탁해오면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치료해주면서 생명을 구해주었지요.
천진시종류병원 정문에 세워진 김현택 교수의 동상을 찾은 부인 오패구(앞줄 가운데)
4인무리가 타도되고 해방을 받은 김현택 교수는 90세가 넘은 중국의 저명한 인구론학자 마인초교수를 수술치료하여 건강을 찾아줌으로써 의학사상 기적을 만들었어요. 외과전문가들은 뒤끝이 깨끗한 그의 능란한 수술치료를 견학하면서 수술이라기보다 예술이라고 경탄을 금치 못하였지요.
1977년 김현택 교수는 우리 나라에서 해마다 암으로 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절부절 못하였지요. 그는 천진시를 대표하여 제1차전국과학기술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뒤 즉시 암치료 원견계획과 단기조치를 작성하여 상급에 바쳤고 천진에 현대화종양병원을 세울 자금을 얻어들였지요.
10년간의 노력을 거쳐 1987년 천진시에 현대화설비를 갖춘 종양병원이 일떠서게 되자 그는 너무 기뻐 눈물까지 흘렸지요. 김현택 교수는 1985년 81세 되는 해에 마침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어요.
1990년도에 우리 나라 '종유의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던 김현택교수는 세상을 떠났어요. 1994년 천진시위생국 위원회에서는 김현택 탄신 90돐을 기념하여 "김현택을 따라배우는 활동을 전개할 데 관한 통지"를 발부하였어요.
"우리 나라 저명한 의학과학가이며 중국종양의학의 창시자이며 원 천진시종양병원 원장인 김현택교수의 중국항암사업에 대한 탁월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중공중앙선전부의 비준을 거쳐 김현택 교수의 동상을 세운다. 이에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전국정협 주석인 리서환동지께서 친히 동상에 ‘덕이 높고 의술이 정수에 이르다’(德高医粹)는 제사를 써주셨다…"
제4통계력학리론의 창시자 김일광 교수(金日光 1933년-)
제4통계력학리론의 창시자 김일광 교수를 만나기 앞서 나는 며칠동안 갖은 신고를 겪으며 그의 략력과 그가 거둔 성과목록들을 읽어보았는 데 과학용어사전을 뒤지는데만 꼬박 사흘이 걸렸어요
그의 끈질긴 분투와 아름찬 성과 그리고 뛰여난 재질에 나는 크게 놀랐고 더 없이 감동된 나머지 원고지머리에다 저도 모르게 ‘한세대의 별’이라고 큼직이 써놓았어요.
우리 민족은 총명한 민족으로서 인내력과 꾸준함을 겸비하면 못해낼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는 김일광 교수
그는 북경화공공업대학 학술위원회 주석이고 북경화공공업대학 고분자재료과학 및 공정 국가중점학과 수석 박사생 지도교사였어요. 또 전국정치협상회 상무위원이고 국가특별공헌전문가이며 중대한 기여를 한 전국 10명 화학공업 우수전문가, 전국고등학교 과학기술선진사업일군, 도꾜리공대학 객원 교수, 국제류변학회 중국대표…
김일광은 1933년 9월 도문철도운반공의 아들로 태여났고 가정살림이 구차하여 늘 헌옷을 입고 맨발바람으로 학교를 다녔지요. 그는 소학교때 일어로 된 《큐리부인전》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어린 시절 명인전기가 주는 영향은 아주 크다고 거듭 말하였어요.
1952년 동북인민대학(지금의 길림대학) 화학학부에 입학한 그는 행운스럽게 우리 나라의 저명한 화학자 당오경(唐熬庆) 교수를 만나게 되였지요. 1956년 우리 나라 첫 준박사연구생제도가 나오자 역시 가장 존경하는 당오경 교수의 준박사연구생으로 되였어요.
당오경 교수는 늘 그에게 "자신이 거둔 작은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꾸준히 견지하기만 한다면 기필코 성과를 거둘 수 있다."(持之以恒 必得硕果)고 하면서 이 여덟자를 그의 책에 적어주셨다고 했지요. 일광이는 이 귀중한 가르침을 가슴속 깊이 아로새기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단속하고 체찍질하였지요.
나는 그의 책상위에 놓인 "중국과학기술의 별"(中国科技之星) 이라는 영예증서를 보면서 그의 주요성과인 제4통계력학리론에 대해 물었지요. 이 리론은 1988년에 아유파크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하였는데 ‘군자리론’ 또는 그의 이름자를 따서 ‘JRG통계력학방정식’이라고도 하였어요.
재미나는 것은 김일광 교수의 이 새로운 리론체계는 모주석의 ‘모순론’을 수학방식으로 풀어낸 리론이라고 하였어요. 그는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조선특무’ '일본특무’‘수정주의숭배자’등 온갖 ‘모자’를 쓰고 낮이면 비판투쟁을 받고 갖은 수모와 시달림을 받아야 했으며 밤이면 끊임없이 검토서를 쓰고 모주석저작을 학습하여야 했지요.
그는 리론을 파고들기를 무척 즐겼는데 모주석의 ‘모순론’을 읽고 또 읽으면서 대립통일에 관한 리론이 모든 사물의 보편진리라고 한다면 이 리론은 자연과학에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지요. 그는 수용실에 전기가 없으면 가로등밑에 걸상을 놓고 앉아 계속 ‘모순론’을 연구하였지요. 그를 지키고 감시하는 사람들도 그가 그냥 '모순론'을 학습하니깐 그대로 내버려 두었대요.
그는 수용실에서 풀려나 온 뒤에도 계속 ‘모순론’을 연구하면서 자연과학과 련결시켰지요. 10년이 지난 1978년도 ‘문화혁명’이 끝나면서 그의 ‘모순론’을 수학방정식으로 풀이한 ‘군자리론’도 성공하게 되였지요.
어느 한 저명한 교수의 평가에 따르면 제3까지의 통계력학방정식은 구라파에서 나왔고 그 방정식들은 어떤 문제는 풀리지 않는 것도 있지만 김일광의 제4통계력학방정식은 어떤 문제나 죄다 풀어진다고 하면서 아주 신비롭고 묘한 학문이라고 하였어요.
강경산 원사에게서 듣는 성공메세지(姜景山 1936-)
우리 나라 첫 조선족원사 강경산 연구원은 룡정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어요. 다섯살에 아버지를 여의였고 어머니는 혼자서 여러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두부도 해 팔고 강가에 나가 자갈도 치고 하면서 고생하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는 14살에 고향 룡정을 떠나 북경에 와 고중공부를 하고 구쏘련에 가서 6년 류학하고 돌아와 우리 나라 인조위성 연구제작사업에 참가하게 되였어요. 그리고 도중에 미국에 가서 수년간 연수하고 돌아와 줄곧 우주항공부에서 사업하게 됩니다. 그가 27살에 인조위성연구제작사업에 참가할 때 우리 나라 저명한 과학자들인 전학삼, 조구장 등이 직접 이 과제를 책임지고 지도하였지요.
우리 민족 젊은이들에게 성공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강경산 원사.
인조위성연구제작사업에서 운반로케트의 위치확정 문제는 강경산의 과제조에서 맡아하였고 그가 조장을 맡았어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밤낮으로 분전하여 끝내 위성을 하늘로 올려 보내게 되지요. 그는 우리 나라 〈량탄일성〉(两弹一星)발사의 주인공의 일원이 된 것이였어요.
1999년 중국공정원에서는 새로운 원사를 선출하였는데 중국과학원 공간과학 및 응용연구센터의 강경산 교수가 첫 중국조선족 원사로 당선이 되였지요. 2000년 3월 12일 강경산 원사 당선 수도 조선족 축하모임에서 그는 젊은 벗들에게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어요.
한사람이 지정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는 순탄할 때보자 어려울 때가 더 많으며 역경이 더 많습니다. 한사람이 만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고 역경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그렇다면 역경을 이겨나가는 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리상과 신념입니다.
나는 이런 리상과 신념이 있었기에 북경에 와 고중에 다닐 때 개학전 밥 먹을 곳이 없어 민정국 소개로 하루에 몇리씩 걸어 소년교화소에 가 옥수수떡을 두끼씩 얻어먹으면서도 남들 못지 않게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리상과 신념이 있었기에 '문화혁명'기간 시골에 쫓겨가 남들이 맥을 버릴 때도 과학연구에 일심전력으로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한사람의 리상 다시 말하면 목표는 국가의 수요와 당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부단히 조정하게 되지만 개인의 리상을 나라의 수요와 결부시켜 노력한다면 새것을 창조할 수 있고 나라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리상을 실현하려면 꼭 노력,분투해야 해야 합니다. 노력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앉아기다려서는 안되며 주동적으로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내가 미국에 갔다온 후 한때는 시기와 질투를 받아 연구과제가 차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호북 호남 등지로 내려가 주동적으로 기회를 찾았습니다. 비행기탑재 칼라영상실시전송(机载) 원격탐측시험성과와 홍수방지 원격탐측응용시험성과 등은 이렇게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한사람의 성공에 있어서 여러 방면의 지지 특히 가정의 지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젊은 벗들은 성공하려면 자신을 지지하고 리해해줄 수 있는 반려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한사람의 성공에서 아주 중요한 조건이기때문입니다.
‘청출어람’이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리상과 신념을 지니고 기회를 다잡아 노력분투한다면 더 많은 우리 민족 원사들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김청수 영상사진/김성걸
1999년 작가 김영금 제6차 전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 수상
그리하여 두달동안 북경대학 동문옆 세방에서 머물면서 중국과학원 공간과학 및 응용연구센터 소장 강경산 연구원, 제4통계력학리론의 창시자 김일광 교수, 계통과학연구소 한경청 연구원, 저명한 어뢰총설계사 류영철 등 고급공정기사들에 대한 계획취재를 마무렸어요.
취재대상들에게서 갖고 온 자료들이 일본어로 된 것은 큰 딸이 번역해주고 영어문으로 된 것은 작은 딸이 번역해주었어요. 중국어고문자료는 아들이 번역해주고 타자는 며느리가 맡아주었지요. 그리고 자연과학자인 남편이 전적으로 지지하고 저극적으로 도와주었어요.내가 찾아 읽은 자료는 100만자도 훨씬 넘었어요. 한사람을 쓰는데 한달씩 걸렸지요. 한달을 쓰고는 머리병이 도져 주사를 맞고 또 한사람을 쓰고는 주사를 맞으면서 나는 25만자에 달하는 글을 완성하였어요.
1998년 7월 민족출판사에서 《한세대 별》이라는 제목으로 계획출판도서에 넣어 출판해 주었지요. 그리고 이 책은 또 1999년 10월 연변작가협회 추천으로 전국소수민족 제6회 준마상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였지요.
이 상은 나에게 준 상이 아니라 중국조선족자연과학자 실화계렬작품집에 준 것이였지요. 주저앉고 싶고 울고 싶고 뒤걸음 치고 싶을 때마다 과학자들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정신, 과학을 위한 희생정신, 간고분투하는 정신과 높은 인격이 나를 꿋꿋이 일어서도록 받들어 주었지요. 나는 이 상을 거룩한 우리 민족 과학자들에게 드리고 싶었어요.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영상사진/ 김성걸
길림신문 대형구술시리즈 '문화를 말하다'
김영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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